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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무적 전차 티거 탱크

1942년 8월 29일 레닌그라드 남동쪽 소도시 음가의 기차역에서 4명으로 구성된 독일의 소형 전차부대가 출발하여 인근 고지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뒤로는 소수의 인원을 태운 차량이 함께 움직였지만 전투부대는 아니었다. 이례적으로 헨셸에서 파견된 민간 기술자들이 차량에 탑재됐다.

앞으로 전진하는 4대의 전차는 헨젤이 야심차게 만든 신형 전차로, 실제 전투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기술자들이 독일 본토에서 1500km 이상 떨어진 최전방에 나와 결과를 측정했다. 탱크는 느릿느릿 움직였지만 산비탈을 가로지르는 산비탈 위로 거침없이 빠르게 사라져 후속 차량들이 곧바로 따라오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언덕을 따라 올라가던 기술자들이 헛수고만 하고 있는 상황을 보니 매우 실망스러웠다. 4대의 탱크 중 3대는 더 이상 가동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적의 공격으로 파손되지는 않았지만 엔진이나 변속기의 오작동으로 기동할 수 없었다. 결국 단 1대의 차량만이 전과 없이 떠났던 곳으로 되돌아갔고, 적진에 남아 있던 나머지 3대는 우여곡절 끝에 수습됐다.

첫 전투에서 이렇게 애처로운 모습을 보여준 탱크는 독일 6전차, 지극히 유명한 판자캄프파겐 6호 타이거 아우스프였다.E. 독일 전차부대가 몇 달째 듣고 있는 기적의 새로운 탱크가 나타날 것이라는 소문에 비하면 시작은 참담했다. 베를린 정책 당국도 실망했다. 그러나 이 당황스러운 데뷔작과 달리 티거는 역사에 남으면서 ‘제2차 세계대전을 상징하는 탱크’라는 명성을 얻었다.

근대적 의미로는 영국이 먼저 탱크를 만들었지만, 독일은 탱크를 지상전의 왕자로 만든 나라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무기회사로 남을 수 있는 여러 종류의 탱크를 도입했지만 처음부터 그렇지 않았다.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패전 당시 중무기의 보유와 개발에 한계가 있었던 나라였다. 따라서 1934년 히틀러가 재장전을 선언하고 본격적으로 전차 건설에 착수했을 때는 여러 가지 단점이 있었다.

처음 생산된 전차 1·2는 참마전차였고, 전쟁 직전에 도입한 3, 4전차는 주변국의 경쟁전차를 압도할 수준이 아니었다는 점을 언급하기가 민망했다. 당시 독일은 기존 다리를 건널 수 있는 무게로 탱크 크기를 제한했고, 이런 기준에 맞춰 탱크를 개발하면서 어느 정도 화력과 방어를 포기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전차들은 선봉장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그러나 이는 탱크의 성능보다는 탱크부대의 조직과 운용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 몇몇 지휘관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최전방에서는 신형 전차에 대한 수요가 이어졌고, 과거를 분석한 당국도 전차의 생존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화력과 방어를 강화해야 한다고 인정했다. 이에 따라 1941년 초 육군 군무국은 4호 탱크를 추종하는 새로운 탱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른바 VK3601은 선도 무기 업체들이 개발 경쟁에 뛰어든 초기에는 무게 30톤 정도의 75mm 구경포를 설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히틀러가 기동성을 희생하더라도 강력한 화력이 필요하다며 적극적으로 개발에 개입하자 무게 50톤이 훨씬 넘는 VK4501로 발전 방향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방어력 때문이었지만, 대형 칼리버포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탱크 크기를 늘려야 했다.

헨젤과 포르쉐는 결승전에 출전했지만 88mm 56mm 포와 75mm 70mm 포 중 하나를 선택할지는 결정하지 못했다. 이때는 독일의 전성기라 여유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VK4501 사업이 막 시작된 1941년 7월, 동부전선의 소식은 독일에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소련 T-34와 KV 전차는 기존의 모든 독일 전차를 능가했다.

당장 새 탱크의 개발에 박차를 가할 이유가 있었다. 이때 포획된 소련군 전차는 좋은 참고자료가 되었다. 실제로 티거는 이후 등장한 팬더 5호 전차, B형 쾨니히스티거 전차 6호와는 달리 독일의 전통적인 전차 모양을 계승한 마지막 작품이다. 특히 차체의 각도는 4차 탱크와 비슷하지만 무게가 2배 가까이 나가므로 한마디로 확대형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전력과 정지를 구축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우려는 끝까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고, 결국 티거 전차의 약점으로 남아 있었지만, 포획된 소련 전차로부터 많은 기술적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덕분에 1942년 4월 20일 히틀러 생일에 시제품이 히틀러에게 공개되었다. 다양한 실험 결과 헨젤의 VK4501(H)이 선정되었고, 중반에 와이어를 삽입할 목적으로 양산에 들어갔다.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도 있었던 개발 및 대량 생산 과정이었다. 원래 ‘타이거’는 포르쉐가 자신들의 프로젝트인 VK4501(P)에 붙인 예명으로, 이후 6호 탱크의 상징이 됐다는 점이 흥미롭다. 지금까지 승승장구만 하다가 1941년 겨울 진격 차단을 당한 독일군은 티거를 운용할 별도의 부대를 창설해 새롭게 부상하는 중전차에 대한 엄청난 기대를 품고 있었다.

창설 초기 병력 중 하나인 502 중전차대대대대 중 4대가 최전방에서 도입된 전투에 돌입하면서 티거는 전쟁사에 얼굴을 내밀었다. 사실 데뷔는 당황스럽게 끝났지만, 하루빨리 결과를 보고 싶다는 히틀러의 조바심이 작용한 결과였다. 적절한 실험 없이 실행에 옮겨졌고, 당시 전장 환경은 티거의 작전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 결과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점을 보완한 티거가 힘을 입증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42년 말 북아프리카에서 밀려나온 축 열강을 지원하기 위해 투입된 501 중전차 대대는 이듬해 5월까지 신형 M4 등 150여 대의 미국 전차를 파괴했다. 실패로 시작된 동부전선도 빛을 발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대규모 전차들이 남녀 전투를 위해 경쟁하는 장갑전에서는 더욱 빛을 발했다.

1943년 이후 본격적으로 전선에 모습을 드러낸 티거는 상대편에게 공포의 표적이 됐다. 특히 공군의 지원 없이 탱크부대 간 장거리 교전이 이뤄지면서 일방적인 결과가 나왔다. 총의 사정거리와 화력의 차이가 너무 커서 티거가 상대 사정거리 바깥에서 편안하게 공격할 수 있었던 반면 상대는 최대한 빨리 가까이 와야 티거를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은 너무 위험했다.

디펜스도 티거의 힘을 보탰다. 앞서 언급했듯이 타이거는 독일 전통 탱크의 설계에 따라 앞갑옷이 비스듬한 갑옷은 아닌데도 100mm에 이를 정도로 뛰어난 방어력을 자랑했다. 티거의 명성은 뛰어난 공격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수의 상대 공격을 쉽게 차단할 수 있는 수비 능력 때문이기도 하다. 생존은 승리의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지만 수비가 나쁘면 생존 가능성이 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