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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폭격기 호위기 F-101 부두 전투기

전후 국방정책을 설계할 때 가장 먼저 제2차 세계대전을 언급했지만, 승리를 위해 최대한 빨리 상대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에 걸맞은 무기를 보유할 필요가 있었고, 전쟁이 끝난 1945년 8월 6일 미국이 처음 사용한 핵폭탄은 이정표가 되었다.

이제 막대한 희생을 치루고 전선에서 밀고 당길 필요 없이 적진 한가운데에 핵폭탄을 던지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본 것이다. 핵무기가 정치외교적으로 워낙 민감한 만큼 지금은 시각이 많이 바뀌었지만, 당시는 미래의 군사전략이 핵무기에 집중하는 것이 당연했고, 이 분야를 주도하던 미국은 계속 우위를 점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에 따라 핵폭탄을 탑재할 전략폭격기의 위상이 높아졌다.

그러나 1949년 8월 29일 소련이 핵폭탄 실험에 성공하자 미국의 전략적 이점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히로시마 폭격이 있은 지 불과 4년 만에 미국도 핵무기의 위험에 노출돼 이를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을 개발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를 한 번에 압도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의 전략무기를 보유하면서 한편으로는 공포에 떨어야 하는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F-101 부두교는 이 시대의 자화상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파이터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전략폭격기를 호위하기 위해 개발되었으나 이후 환경이 급변하면서 사용목적이 여러 차례 바뀌었고, 당초 계획과 달리 적진을 감시하던 정찰기로서 생애를 마감했다. 한마디로 핵무기 공포가 지배하는 초기 냉전의 격동기를 뚜렷이 대변하는 투사다.

폭격기 분야는 미국의 일방적 독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국 아브로 랭커스터처럼 좋은 폭격기도 있었지만 이른바 전략폭격의 역사는 미국이 주도했다. 특히 1945년 핵폭격은 당시 미국 폭격기의 역량이 정점이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폭격기는 장거리 비행을 할 수 있고 많은 폭탄을 운반할 수 있어 불가피하게 속도가 느리다. 상대의 공격에 상당히 취약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폭격기들을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이 마련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고성능 전투기의 근접 호위였다. 장거리 비행과 뛰어난 전투 능력을 갖춘 P-51은 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한 대표적인 호위함이었다.

P-51은 최고라고 칭송할 수 있는 우수한 전투기지만 종전에는 신세대 전투기에 주인공 자리를 내주는 것이 불가피했다. 본격적으로 정식화되기 시작한 제트 전투기들 때문이었는데, 그 말은 호위대를 제트기로 개조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폭격기 힘의 우위를 계속 유지한 미국은 장거리 비행이 가능한 제트기 시대의 호위함 건설에 착수했다.

전략폭격 전담 전략공군사령부(SAC)가 창설된 직후인 1946년 미국은 장거리 침투 전투기 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선두 전투기 제조사들이 경쟁에 뛰어들었고 맥도넬의 XF-88도 후보군에 포함됐다. 그러나 북미에서 제안한 YF-93에 미 공군이 관심을 보이면서 XF-88 개발은 두 대의 실험 항공기를 거쳐 취소됐다.

그러나 1949년 소련이 핵폭탄 개발에 성공해 첫 전략폭격기 tu-4를 실전 배치하자 미국의 또 다른 화두였던 본토 방어가 불똥이 됐다. 장거리 침투 전투기의 개발은 침입한 소련 폭격기를 요격하기 위해 방공 전투기를 도입해야 하는 긴급한 필요성 때문에 중단되었다. 대신 미국은 B-36에 속도를 높이고 제트폭격기인 B-47의 위력을 높이기 위해 제트엔진을 장착하면 폭격기만으로 적에 침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듬해 발발한 625전쟁은 사태를 원점으로 되돌렸다. 공중 우위 확보를 믿고 폭격에 나섰던 B-29는 갑자기 나타난 MiG-15에 속수무책이기 시작했다. 곧바로 F-86이 투입돼 폭격기를 보호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반도의 깊이가 짧아 즉각적인 대응이 가능했다. 물론 폭격기들이 소련을 폭격하기 위해 장거리를 날아다닌다면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폭격기가 호위병들의 도움 없이 MiG-15가 촘촘히 배치된 소련 본토 깊숙이 들어간 것은 자살행위였다. 그때까지 핵폭탄 수송수단은 폭격기뿐이어서 전면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지만 폭격기가 목표지점으로 날아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비록 F-86이 한반도에서 맹위를 떨쳤지만, 폭격기로 그렇게 오래 다닐 수는 없었다.

결국 다시 원거리 호위대의 역할이 등장했고, 거의 죽을 뻔했던 계획이 극적으로 되살아났다. 재시동 대회에서는 맥도넬이 선보인 XF-88 개량형을 타깃 모델로 선정했고, SAC는 한국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당초 계획했던 장거리 비행 능력 외에 고속 비행을 요구했다. 현재의 MiG-15의 위협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 정도의 성능이 필요할 것으로 여겨졌다.

맥도넬은 14,880 파운드의 추력을 생산할 수 있는 J57-P13 엔진이 마하 1.5 이상의 고속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결정했다. 그러나 그것을 탑재하기 위해서는 기존 동체를 확장해야 했고, 결국 신형 항공기 생산에 버금가는 대대적인 개보수 작업이 진행되었다. 개발과 동시에 주문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이른바 쿡크레이지 플랜 덕분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전선에 신무기를 신속하게 보급하기 위해 쿡크라이그 계획을 개발하여 동시에 생산하였다.개선이나 개선이 불가능한 치명적인 문제가 생기면 이미 만들어진 부분은 모두 폐기된다. 할 수 있는 리스크가 있지만 대량생산 기간을 단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한마디로 전시에만 쓸 수 있는 개발 및 생산기술이지만 미국은 자국의 안보가 상당히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이 과정을 통해 XF-88보다 약 4m 길었고 최대 이륙 중량이 2.5배 이상 늘어난 F-101 시제품이 1954년 처음 비행했다. 20㎜ 대포 6발을 탑재한 XF-88과 달리 공대공 전투무장으로 AIM-4 공대공 미사일 6발을 탑재해 최대 2450㎞ 반경에서 작전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 마하 1.72라는 최고속도를 달성할 수 있어 초기 SAC가 요구하는 요건을 거의 충족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이야기가 이상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사거리가 길고 탑재용량이 약 8톤인 만큼 폭격기로 활용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mk7처럼 다양한 종류를 장착할 수 있는 핵폭탄이 등장했고, 가능한 아이디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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